아주 어렸을적부터 우리집엔 똥개에서 도사견까지 안키워본 개가 별로 없을정도였다.
물론, 똥개가 압도적이었으며 당시에 개키우는 집에서는 한번씩 겪어보았듯이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쥐잡기운동탓에 으슥한 곳에 놓아둔 쥐약을 먹고 죽은 강아지가 대략 10마리는 되는것 같다.
한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잠깐 키우던 도사견은 어느날, 새끼 15마리를 이틀간 낳았는데 그중 3마리는 죽고 한마리만 남긴후 나머지는 모두 분양했다.
당시엔 내가 어렸지만, 그 생이별을 직면한 어미개의 눈에 눈물이 줄줄 흘러 눈꼽이 덕지덕지끼고 있는걸 보며 눈물을 닦아주곤 했다.
동물이라 하여 어찌 생이별이 슬프지 않겠는가.
오히려 이별에 직면할땐 사람보다 동물들의 직감이 더 정확하고 빠르다.
그 집채만한 개가 꺼이~꺼이~하며 통곡하는 소리로 우리집 마당 대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때 나는 계단에 앉아 무얼 하고 있었던가.
강아지들을 떠나보낼때마나 나는 마당 계단에 앉아 울었다. 그렇게 개들과 나는 어린시절 참 좋은 친구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어미개가 어디서 물어왔는지 지하실구석에 쥐잡이용으로 놓아둔 우유팩의 밥찌꺼기(쥐약넣은)를 물고와 새끼까지 먹이고는 급기야 일가족이 몰살한 일이 있었다.
개들이야 사람이 어디다 독약을 놓았는지 알길이 없었겠지.
아니, 독약을 놓았으리라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람으로 치자면 동반자살이다. 자살을 가장한 타살. 인간에 의한 타살이다.
먹어서 죽을 음식이야 쥐약밖에 없던 세상이지만, 그런것이 있다는것을 알리가 만무한 짐승들이야말로
잘살아보세~~라는 발전적 구호아래 방치된 그 시대의 소모품이었다.
강아지들은 참으로 사랑스런 존재.
인간을 그리도 따르는 동물이 어디있는가.
사람들이 아무리 때리고 괴롭히고, 고통을 줘도 손가락만 쩔래쩔래 흔들면 다시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것이 강아지의 속성이다.
몇년전 겨울 정신적으로 너무 피로하여 자주가던 강릉~주문진 사이의 허름한 바닷가 민박집에서 5일동안 잠수타며 쉬었던 적이 있었다.
그집에는 한쪽 눈알이 시꺼멓게 파헤쳐져 함몰된 강아지가 있었다.
이놈이 사람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5일내내 이놈과 친구가 되보려고 무수히 노력했건만, 인간에 대한 증오는 쉽게 걷을 수 없었다.
그 눈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조금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불쏘시개같은걸로 쑤신형상이다.
눈 주위의 살부위는 화상자국이 선명하고, 눈알은 들었는지 알 수 없도록 시껴먼 구멍만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잔잔했던 5일중에 인간에 대한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일었던 시간이었다.
사람이 아니고서야 무엇이 그런짓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건 사람이 아니었겠지.
무늬만 인간형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라, 누가 사람인지 누가 괴물인지 알수가 없다.
시골생활에서 개는 그저 잔반처리용 가축일뿐이다. 물론, 그런 시골사람들의 생각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좀 더 여유를 갖고 애정어린 눈으로 가축을 떠나 이미 인간의 친구가 되어 있는 우리주위의 개들을 보아주었으면.....
요즘 수많은 유기견들을 보며, 생명에 대해, 그리고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위의 무수한 생명에 대해, 우리 젊은날 많은 시간과 불면의 밤을 투자해서라도 그 존귀함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내면의 소리를 일깨워야 한다.
나 자신이 그 존귀함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싶을때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노력을 해보아야 한다.
고양이가 담을 넘고, 쓰레기통을 뒤질때.
길가던 강아지가 사람들에게 발길질을 당할때.
무심코 밟혀버린 수많은 생명들.
우리는 그때 그들의 눈으로 들어가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처럼 쓰레기맛을 느껴야 하고, 발길질의 고통을 참아야 하며, 그렇게도 나를 괴롭힌 주인에 대한 배신감은 한순간 잊어버리고, 한없이 따르는 바보짓을 감수해 보아야 한다.
차가 쌩쌩다니는 도로를 목숨걸고 횡단해야 하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달리는 차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되면, 서서히 깨우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연민이 아닌 생명을 이해하고 지키는일. 그건 감정만으로는 혹은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는것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라고 별반 다를것이 있겠나.
사람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판에 동물을 이해하는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역시 자신의 이해심 부족을 탓해야하는 반문을 남긴다.
내가 보고싶은것만 보며, 내가 느끼고 싶은것만 느끼는것.
내가 꼭 사랑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서 버티지 못할것들만 사랑하는 우리네 인생은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일뿐, 무엇하나라도 더 큰 휴머니즘이 있기나 하겠는가.
우리는 그런 이기심과 사랑을 수시로 혼동하며, 세상에 휴머니즘을 외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외치며 눈을 감고 달려가고 있지만, 자신이 헌신적으로 달렸던 그 아가페가 독극물이 든 먹이를 자식에게 갖다주는 어미개의 마음이 그랬듯이 서로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